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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 준비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접한 후스크밋나운의 예술세계는 복잡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순수함과 단순함 그 자체였다. 세계 행복지수 1위인 덴마크의 '휘겔리(hyggely)’한 삶과 교육 속에서 자연스레 배양된 자유로운 상상력 때문인가? 후스크밋나운의 작품들은 ‘일상 속의 소소한 즐거움이나 안락한 환경’에서 오는 행복한 장면들을 많이 연출해낸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와 재치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한 오쟁이 진 남편의 분노한 모습과 건물 외벽으로 옷을 벗은 채 달아 난 외도남의 표정이 코믹하게 전해지는 소소한 유머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의 장면들을 새롭게 포착해내는 아날로그적 상상력에 우리의 혀가 내둘려진다. 볼수록 빠져드는 그의 종이 예술은 물살을 가르며 수상스키를 즐기는 역동적인 모습과, 경사로에서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슬아슬한 장면까지 그야말로 ‘어메이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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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에 필요한 것은 오직 종이와 펜이다. 찢기, 구기기, 자르기, 붙이기, 접기를 통해 그림을 ‘만든다’. 수상스키가 가르는 물살은 종이를 구겨서 역동성을 표현하고, 종이를 찢어 표현한 두루마리 휴지는 금방이라도 풀려나올 것 같다. 후스크밋나운의 간결하면서도 인상적인 작품은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을 타고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새로운 그림을 구상하기 위해 평평한 종이 한 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문득 종이접기 드로잉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결국 식탁에서 3D 드로잉 기법을 터득하게 됐다. 호텔 객실이든 공항이든 시간이 날 때마다 그림을 그렸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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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얇아도 엄연한 3차원 물질이다. 종이는 종이 위에 그린 그림으로만 인식될 때 2차원으로 존재한다. 그 착시현상을 통렬하게 뒤집은 페이퍼 아트가 전 세계 SNS를 강타했다. 낡은 선입견을 깨는 데 필요한 건 A4용지 한 장과 검은 펜 하나뿐이었다.

- 덴마크의 그래픽 아티스트

입체그림 작품집 ‘종이인간’ 출간… 덴마크 작가 후스크밋나운 인터뷰

책상 위에 놓인 백지에 잔뜩 용쓰며 낚싯대를 당기는 남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낚싯줄 끝에 걸린 건 한 귀퉁이를 슬쩍 휘어 접은 백지 뒷면의 물고기 그림. 얼핏 장난스러운 낙서 같지만 종이가 가진 탄성(彈性)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 재기가 엿보인다.

낙서인 듯 낙서만은 아닌 입체그림이다. 덴마크 작가 후스크밋나운(42)은 이런 비슷한 성격의 작품 사진을 모아 신간 ‘종이인간’(북레시피)을 최근 펴냈다. 그는 동아일보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나는 ‘장난스러운 예술’을 추구한다. 내가 만들어낸 드로잉 이미지를 본 누군가가 완전히 다른 방식의 새로운 드로잉을 생각해 내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본명을 밝히길 거부한 그의 예명은 덴마크어로 ‘내 이름을 기억해 줘요’라는 뜻이다. 그는 코펜하겐 근교에서 성장해 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건물 벽화와 포스터 작업을 할 무렵부터 그 예명을 썼다.

“포스터를 붙여놓으면 바로바로 사람들이 떼어 가져가 버렸다. 그래서 한쪽 구석에 ‘내일이면 이거 또 없어질 텐데, 내 이름은 기억해 줘요’라고 적어서 붙였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내 이름을 기억해 줘요’를 작가 이름인 것처럼 기억하더라. 재미있고 기분도 좋아서 정말 예명으로 삼았다,”

그림을 얹은 A4 백지 한 장을 구기고 접고 찢어 구성한 ‘상황’을 재빠르게 촬영한 사진 이미지가 그의 최종 작업 결과물이다. 다리미 그림으로 구겨진 종이를 다려 펴고, 종이를 찢어 세운 파도 위에 서핑하는 사람 그림을 올린 그의 작품이 구상했던 상황대로 존재하는 시간은 단 몇 초뿐인 것. 후스크밋나운은 “내 그림은 그렇게 사라지기에 가치를 얻는다. 곤충학자들이 촬영하는 자연 관찰 사진과 비슷하다”고 했다.

“이 책에서 선보인 결과물은 내가 하는 여러 작업 중 한 종류다. 캔버스, 벽화, 다양한 디자인 작업을 병행하지만 그림 스타일의 일관성은 유지하는 편이다. 종이를 접고 구기다가 이미지가 튀어나오기도 하고, 반대로 의도한 이미지대로 종이를 변형시키기도 한다. 세상을 관찰해 찾아낸 이미지가 ‘나’라는 도구를 거쳐 형상을 갖추도록 할 수 있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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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넘기다 보면 조물주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이메일을 보내자 하루 만에 솔직담백한 답이 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를 통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그는 “갤러리에만 머무는 예술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고 단언했다. 예술의 빗장을 풀어버린 이 탈권위주의자는 한 발 더 나아갔다. ‘누구든 모방할 수 있는 예술을 하는데 두려움이 없느냐’는 질문에 “누구든 내 그림을 따라 하고 공유해주길 바란다”고 답했다. 이번 책 ‘종이인간’은 후스크밋나운의 초대장인 셈이다. 답장 말미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빨리 동참하길 바란다. 더 기발한 아이디어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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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타이타닉' 속 명장면이 자동차극장 스크린에서 펼쳐진다. 접어올린 종이는 스크린이, 찢어 말아올린 종이는 그럴듯한 승용차가 됐다.

덴마크 작가 후스크밋나운('내 이름을 기억해 줘'라는 뜻의 예명)은 종이를 찢고, 구기고, 접는다. 종이 위에 펜으로 그린 2차원 그림을 3차원 입체로 만든다. A4용지 한 장으로 전 세계를 사로잡았다. 창의성은 제약 속에서 더 빛난다. 후스크밋나운의 작품집 '종이인간'(북레시피 刊) 98쪽에서.

종이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면 종이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일상생활의 변화무쌍한 상황들이 구겨지고 접히고 잘리는 과정에는 작가의 유머와 삶에 대한 통찰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어느 날 새로운 그림을 구상하기 위해 
평평한 종이 한 장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을 때 
문득 종이 접기 드로잉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종이 한 귀퉁이를 접어 그 위에 그림을 그리면 
어떤 모양이 될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휴지통에 점차 많은 종잇장들이 쌓여갔고 
결국 나는 식탁에서 3D 드로잉 기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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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치한 표현은 좀 미안하지만, ‘3D 페이퍼 아트’라 해서 책을 펼쳤을 때 종이가 벌떡 일어나진 않는다. 종이 대신 벌떡 일어서는 건 짧고도 유쾌한 상상이다. 책의 참맛은 한껏 묘사한다고 해봐야 한정적일 수 밖에 없는 글과 그림의 여백이 강제(?)하는 상상력 아니던가. 구겨진 종이를 이용해 블랙홀, 아니 화이트홀로 빠져들어가는 인물을 표지에다 그려둔 것부터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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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스크밋나운은 종이를 접고 구부리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입체적 효과를 만들어낸다. 빗속 흙탕물이 튀고, 코브라가 스르르 올라오고,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종이 위에 생생하게 펼쳐진다.